수원교회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작성일 : 16-06-03 15:19
2016년 5월 29일 "잃은 것의 회복(하나님의 사랑)"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497  

잃은 것의 회복 (하나님의 사랑)
시 128:1-6, 눅 15:11-24

네델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누가복음 15장’의 내용을 소재로 삼아 그린 작품이 바로 ‘돌아온 탕자’란 제목의 그림입니다. [그림] 아버지는 자식으로 인한 지난 날의 고통과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다정한 손길로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은 왜소하고 초라하기만 합니다. 값진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쓴 채 서 있는 형(兄)은 굳은 표정으로 아버지와 잃어버렸던 동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밝은 빛으로 강조된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과 흰 수염, 그리고 핏기 없는 손길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쥐어뜯긴 것같이 보이는 엉성한 머리에 누더기 옷을 걸친 아들은 죄 많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뒤에 어둡게 묘사된 사람들은 ‘시기’와 ‘무정함’과 ‘죄악’을 상징합니다. 인간 내면의 ‘사악한 마음’과 그에 따른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로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 화가 ‘렘브란트’는 역사상 위대한 ‘종교화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신약성경 본문 말씀과 함께 보신 ‘렘브란트’의 그림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關係)를 잘 표현해 주는 하나의 구속사적 메시지(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또한 긴 ‘방황’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참 위치를 깨닫게 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Story’입니다.
1. ‘집을 떠나는 아들’
(1) 둘째 아들의 ‘욕망(慾望)’을 볼 수 있습니다. 집을 나가는 둘째 아들의 ‘궁극적인 욕망’은 아버지의 재산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아버지를 떠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자유로움과 독립, 그리고 물질과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으리라는 탐욕, 소유욕, 권력욕 등이 그를 충동질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2) 그러면 그 ‘욕망’을 어떻게 채d고 있습니까?, 집을 나오기 전,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順從)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라도 가능했지요.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때문이지요. 여러분, 여기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것이 아들이 아버지의 종(노예)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그러한 순종을 통하여서 아버지의 지혜(智慧)를 얻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화목(和睦)을 이루면서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는 이러한 모든 ‘축복의 열매’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3)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은 결국 실패(失敗)하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세상을 바로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이 둘째 아들은 철저한 ‘실패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物質)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분명한 물질관이 없었던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13절]하고 맙니다.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올바른 물질관, 세계관, 인생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비천한 삶’만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2. 돌아온 아들본문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 여기서 ‘스스로 돌이킨’ 둘째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볼 때 “스스로 돌이켜”라는 이 관용어구는 ‘회개(悔改)’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둘째 아들의 ‘회개(悔改)’는 ‘아버지의 집’과 ‘세상’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회개(悔改)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회개)을 ‘하늘’과 ‘아버지’께 죄(罪)를 지었다고[18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범한 실수(失手)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의 풍족함을 버리고 스스로 풍족함을 누리려고 한 것이 첫째였고, 둘째로는 세상을 선택하여 아버지를 등진 것입니다. 그가 단지 물질(物質)을 통한 풍족함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아버지 집 안에서 훨씬 더 물질적 완벽한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마침내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본문 [눅15:18] 서두(序頭)에 나오는 “내가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스타스’로서 ‘죽은 자가 살아나다’ ‘깨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히 ‘회개’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이미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부활’한 것이며, ‘중생’한 것입니다. 돌아가는 실제적인 행동이 [눅15:20]에 나옵니다. 한편 고향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동구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눅15: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드디어 고향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성경은 [20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고 표현합니다. ‘개혁 한글성경’에는 “상거가 먼데” 즉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가 상당히 먼 상황’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먼 거리에서도 아들임을 알아보고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 온 둘째 아들을 울며 끌어 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가 연습한대로 외운 것만 반복하며 말합니다. 첫 번째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두 번째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까지를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용서(容恕)하였기에 그 말들은 모두 의미가 없는 말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입에서 세 번째로 “자신을 일꾼의 하나로 보아주세요” 하는 절망적인 말이 나오기 전(前)에 ‘아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모든 조건을 바로 시행해 버립니다. [눅15:22]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들임을 인정하는 모든 행위에 마지막으로 발에 신을 신기우면서 “너는 절대로 종이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신을 신는 것은 곧 자유인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 그 사랑의 열매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게 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셨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 ‘연약한 자’ ‘장애인’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 섬김의 종으로 사시다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의 길’을 여셨고, 이제는 [요3:16] 말씀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와 ‘사망’ ‘멸망’의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영혼구원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 안에 가득차고 넘쳐서 복된 인생, 참된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