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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22 11:46
2016년 4월 17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절묘하게 만나는 곳"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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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절묘하게 만나는 곳
수 20:1-9, 요일 4:9-11

오늘은 교회력의 ‘부활후 넷째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가 동일하게, 오늘 주일을 1960년 4월19일 ‘민주주의’을 바로세운 ‘4.19혁명’이 일어났던 일을 기념하는 ‘4.19혁명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에서 정한 장애우를 위한 ‘장애우주일’입니다. 어제는 2년 전에 일어났던 있어서는 안 될 어른들의 안전불감증이 낳은 세월호 참사, 단원고교사와 학생들이 250명 그리고 일반인들이 54명 그래서 304명의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을 당한 날인 4월16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말씀을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도피성(逃避城.Cities of refuge)’에 대한 말씀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도피성’이란 살인한 자가 도망하여 들어가는 ‘성(城)’을 말합니다. 옛날 그러니까 고대(古代) 근동에서는 이런 제도(도피성)가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채무, 강도, 정치범 등 ‘범죄자(犯罪者)’들이 ‘신전(神殿)’과 같은 일정한 장소(場所)로 피하여 들어가면 ‘복수(復讐)’나 ‘처벌(處罰)’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인 ‘삼한시대(마한-경기충청전라/진한.변한-경상도)’에도 제사를 맡은 이를 ‘천군(天君)’이라 했고, 그가 거하던 지역을 ‘소도(蘇塗)’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罪)를 범한 사람일지라도 이 ‘소도’로 들어가면 살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제도가 필요한 것은 ‘복수’(復讐)가 너무 난무하여 사회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면을 보면, 성경의 ‘도피성’은 이스라엘만의 문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나 다 있었던 ‘제도’이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가졌던 이 ‘도피성’은 다른 지역이나 또 역사상 나타났던 다른 지역의 ‘도피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도피 장소들은 죄(罪)를 가리지 않고 살려주는 제도(制度)를 가졌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실수(失手)로 살인(殺人)하게 된 경우에만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들과는 다른 ‘독특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민35:9-34]나 [신19:1-3]에서 나옵니다. 이미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명령이었습니다. ‘도피성’에 대한 명령은 이미 그때 주어진 것이고, 이제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기업을 나누는 일이 마쳐지자 여호수아는 이 명령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오늘 구약성경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도피성’은 오늘 설교 제목대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절묘하게 만나는 곳’인 ‘도피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意味)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도피성Cities of refuge’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야기합니다. 살인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실수(失手)로 살인한 경우에만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니까,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신이 범한 살인에 대해서 설명하여야 했다.’고 말합니다. 장로들은 그 말을 듣고, 고의(故意)로 살인한 자에게는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수(失手)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인정되는 자들에 한해서 문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일단 성(城)안으로 들이게 했을지라도 정당한 재판 때까지 그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6절a] 그리고 재판 결과 그가 실수로 살인한 게 아니라 고의(故意)로 살인하거나 율법을 거역하여 살인을 했을 경우는 즉시 성 밖으로 내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율법을 어기게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능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도피성’에서 생명을 보호받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나름대로 열심히 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을 했었겠지요.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연약함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도피성 제도’를 두신 것이지요.
2.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로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도피성’이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그 성(城)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데 장애물(障碍物)이 있다면 그 제도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도피성’으로 가기 전에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잡힌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당한 재판이 있기도 전(前)에 ‘보복(報復)’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복을 한 가족들 역시 살인을 했다는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6개의 ‘도피성’이 나옵니다. ‘게데스’ ‘세겜’ ‘헤브론’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 이렇게 6성읍이 나오고 있습니다.[7-8절] 이스라엘의 지리적으로 큰 특징은 요단강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6개의 성(城)을 이스라엘 지도에 놓고 표시해 보면,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쪽에 3개의 도피성, 서쪽에 3개의 도피성이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동서뿐만 아니라 남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북쪽, 중앙, 남쪽 이렇게 나뉘어서 골고루 분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실수(失手)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자신의 성읍에서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피하여 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만약 좋은 제도로 만들어주셨지만 한 곳에 몰려 있다면 그것은 명색만 있는 것이지 결코 실효성(實效性)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장애(障碍)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높은 장벽을 가진 복음을 주신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생명을 주십니다. 즉 ‘구원의 복음(福音)’을 주시는 것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 ‘도피성’에는 ‘대속(代贖)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민수기’와 오늘 본문을 종합해 보면, ‘도피성’ 안에 들어간 자는 실수로 살인하였다 하더라도, 그래서 죄가 없다 할지라도, 곧바로 성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성(城)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대제사장이 죽을 경우입니다.[6절] 생명은 반드시 생명으로 속(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수로 살인을 했을지라도 ‘대속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수로 일어난 살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 대가를 치루기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하지만, 그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게 아니라, 대제사장이 죽음으로 해서 실수로 희생당한 생명을 대신했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구약성경의 본문 말씀대로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생명을 대신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바로 ‘도피성의 정신’입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머무는 곳인 ‘도피처’의 의미는 바로 ‘생명존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연약하여 그런 것을 요구하거나 알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곧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