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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02 14:48
2016년 3월 27일 "그가 살아나셨고(부활신앙)"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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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 나셨고”(부활신앙) [막 16:1-8, 벧전 1:13-25]

오늘은 예수님께서 죄(罪)로 인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성경 4복음서 [마28:1-18] [막16:1-8] [눅24:1-12] [요20:1-18]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4복음서에 기록되었다는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구전(口傳)을 통해 성경에 기록되었고 신학적으로도 증명(證明) 되어진 확실한 사건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오늘 첫 번째 본문인 [막16장]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안식 후 첫날”(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진때부터 토요일 해가 지기직전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일은 토요일이지요. 그래서 “안식 후 첫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벽같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갔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염려 하나가 있었습니다. 무덤의 큰 돌문을 어찌 열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무덤의 돌문은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屍身)은 없고 ‘빈무덤’이었습니다. 본문 [막16:6b]에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리고 [7절]에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우리 예수님은 진실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감동의 시대’라고 말들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섬길 때 우리는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볼 때 감동을 받을까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볼 때 우리를 정말 성도다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할까요? 교회 잘 다니고 예배 잘 드리는 것은 그들(세상 사람들)에게 기준(基準)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은 교회 잘 다니면서도 악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아왔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큰 이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크리스챤다운 모습을 원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벧전1:21]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나 삶의 소망이 하나님께, 부활하신 예수님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우리를 칭찬하고 인정할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이 사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1.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입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 중 [벧전1:13]을 보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했습니다. 단순히 옷을 그렇게 입으라는 게 아니라 ‘마음이라는 옷을 그렇게 준비된 모습으로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항상 준비되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둔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왜 마음의 허리를 동여야 할까요? 다른 표현으로 왜 “근신하라”고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벧전1:14-16]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모습’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 밖에 나가서 사는 모습에서도 ‘거룩함’이 삶 속에서 묻어나야 합니다. 예배 잘드리고, 기도 잘하고, 찬송 잘하는데, 그런데 교회 밖에 나가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이것은 ‘거룩’이 아니라 ‘가식(假植)’이겠지요.(이중적 생활)
또한 ‘거룩’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면, 거룩을 가장 많이 착각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거룩해야 한다는 건 생각했지만 그 거룩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툭하면 다른 사람에게 거룩하지 못하다고 비난(非難)을 하면서 정죄(定罪)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 정죄할수록 자신들은 그들과 같지 않고 더 거룩한 것처럼 착각이 빠졌습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 병(病)’입니다. ‘정죄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전1:6-7]에 “사람들이 이에서(믿음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 말한 것에 따라 다른 사람이 못한다고 정죄(定罪)합니다. 이게 전형적인 ‘바리새 병(病)’입니다. 이런 것은 결코 ‘거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끊임없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거룩’은 이런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2. ‘두려움’으로 지내는 자입니다. [벧전1:17]을 보면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합니다. “나그네로 있을 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를 이 세상에 대하여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나그네는 항상 두려움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불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 때문에 갖는 ‘겸손함’을 말합니다.
3. 서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벧전1:22]을 보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고 합니다. [23절]과 [25절]에서 말씀하듯이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믿는 게 진리(眞理)를 순종(順從)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십자가와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거짓이 없는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그러면 왜 거짓이 없는 사랑일까요?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낮은 자리, 천한 자리를 찾아가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되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 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관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은 거저 받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은혜(恩惠)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온전히 깨닫는 사람은 역시 그것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나누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자리, 가난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이런 거짓 없는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받은 사랑이 진짜인지 의심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