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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5 15:34
2016년 3월 20일 "십자가 십자가 그 사랑"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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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십자가 그 사랑
사 53:4-6, 요 12:12-1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마치시고 여러차례 반복하여 말씀하셨던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시기 위해 마침내 죽음을 5일 남겨 놓으시고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자들과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면서 예수님을 대환영(大歡迎)을 했던 역사적 사실로,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군중들로부터 대환영(大歡迎)을 받으셨기에 인간적으로는 예수님은 매우 기쁜 날 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날부터 고난(苦難)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이라 함은 오늘(종려주일)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서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전(全) 생애(生涯)가 다 그랬습니다만, 특별히 이 기간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자존심’을 다 버리고 가장 낮은 데까지 겸손하셨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고난주간’은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고백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한 기간이요, 특히 ‘고난주간’의 클라이막스인 금요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각별한 날’ ‘귀한 날’이 됩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말하고 이를 찬양하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되어있는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는 바로 이 고난주간에 등장을 합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는 원래 아름다운 것도 아니요, 찬양할 만한 것도 아니요, 교회 지붕마다, 강대상 마다 내걸만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십자가로 목걸이도 만들고, 귀걸이, 반지 혹은 집안의 장식품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이 십자가는 사형도구(死刑道具) 중의 하나였고, 그것도 가장 끔직하고 무시무시한 죄수들의 ‘형틀’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했던지 법(法)으로도 이 ‘십자가의 처형(處刑)’을 극도로 제한을 해 왔고, 그것도 로마 자국민에게는 어떠한 죄(罪)이건 간에 ‘십자가 처형’만큼은 금지(禁止)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식민지 사람들은 그 잔인함과 끔직함을 직접 보고 들었기에 ‘십자가(十字架)’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때의 장면은 너무나도 처절한 장면이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에는 너무도 먼 거리였습니다. 평탄한 길도 아니거니와 더군다나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기에는 너무나 가파른 언덕이었습니다. 약 250kg이나 되는 엄청난 무게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자니 엎어지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엎어지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엎어지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했습니다. 무려 일곱 번이나 쓰러지셨다가 다시 일어나셔야만 했습니다. 잔인무도한 로마 병정조차도 너무나 처참했던지 구경하던 구레네 시몬을 끌어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은 처참하고 처참하고 또 처참했습니다. 발자욱 자욱마다 피요, 엎어질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옵니다. 그뿐입니까? 넘어지기라도 하면 로마 병정의 손에 들려있는 아홉 가닥의 쇠가죽 채찍이 사정없이 예수님의 등을 내리칩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몸에서는 아홉 점의 살점이 뜯겨져 나가면서 피가 철철 넘쳐흐릅니다. 제가 아무리 좋은 언변(言辯)을 가지고 여러분들께 이 모습을 설명한들 그 처절함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으며, 그 상황을 어찌 다 묘사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런데 이러한 처절한 과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 좋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있어서 이렇게 처참한(잔인한) 십자가, 무서운 십자가가 꼭 필요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주(宇宙)의 주재자(主宰者)이신데, 하늘과 땅의 창조자(創造者)시요 주관자(主管者)시오 섭리자(燮理者)이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이렇게 하셔도 그 누구 하나 감히 (입 한번) 벙긋 못하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이신데, 지구를 태양 주위를 돌라 하시면 돌고, 지구를 자전케 하시면 자전하고, 달과 지구의 거리를 24만 마일로 정하시면 그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 하셨으면 여기에 감히 누가 무슨 이의(異意)를 제기(提起)하겠습니까? 이러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설사 죄를 범했다고 해도 ‘옙다! 모르겠다, 너희 죄는 몇월 몇일부터 무죄다.’ 하고 선고(宣告)만 하시면 될 것을 왜 굳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1.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맺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야 만이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있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늘 이 말씀에서 강조 되는 부분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주셨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마다, 이 구절을 단골로 사용하지요. 말씀이 다 중요하겠습니다만, point를 말씀드린다면 [요3:16]의 첫 부분이 아니라, 차라리 끝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데, 그 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임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겠지?’ ‘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하니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믿겠지?’ ‘십자가의 의미’는, 이렇듯 ‘자기희생’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어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요 ‘마지막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2. ‘공의의 속성’을 만족하시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을 사랑함에 있어서 걸리적거리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죄(罪)’입니다. 이 ‘죄의 문제’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음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자기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屬性)’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공의’(公義)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腐敗)된 죄악성(罪惡性)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래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자기희생(自己犧牲)’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희생’을 통해 그 죄 값을 스스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젠 다 되었다. 내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12군단이 더되는 중무장한 천군천사들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일시에 저들을 진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 묵묵히 묵묵히 로마 병정들의 포승을 받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저 십자가에 달려야만 죄 값이 청산되고, 그래야만 너희가(우리가 아니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맺어 질 수 있으니, 이 방법만이 너희를 사랑하는 증거(證據)가 되니, 그래서 묵묵히 묵묵히 ‘십자가의 형벌(刑罰)’을 기꺼이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필이면 극악무도한 자만이 죽는 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그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罪人)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